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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게 군, 나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아. 하루의 떨리는 손끝이 토게의 뺨을 향했다. 훈련받은 혀는 오로지 고통만으로 빼곡하게 이루어진 침음밖에 내지 못했다. 단말마의 울음이 잇새를 가만히 맴돌던 애틋한 순간, 하루의 뺨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혀끝을 맴돌던 혈향에 죽음을 실감했는지 하루는 가만히 기대어 말이 없었다. 살아야 해. 다정하고 단단하게 살아 줘야 해, 토게. 힘겹게 이어지는 말들에 쵸우사기 하루의 야윈 손을 감싸쥔 이누마키 토게의 손끝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고개를 저어 보아도, 작게 이름을 불러 보아도. 죽음이 우리를 향해 날갯짓을 하던 소리만이 선명한 어느 계절 모를 날에, 하루는 눈을 감지 못한 채 제 느려지는 심장 소리를 가만히 곱씹었다. 이누마키가 쥐고 있던 하얀 손이 축 늘어지던 순간. 괴성에 가깝던 고통스러운 울음 너머로, 이누마키 토게는 하나의 문장을 떠올렸다. 일어나.
멈춰, 하루, 내가, 내가 살려 줄 테니까. 어떻게든 다시 되돌려 줄 테니까. 하루, 제발. 하루. 하루, 살아 줘. 죽지 마. 나만 두고 가지 마. 하루, 멈춰. 죽지 마. 다시 일어나. 살아 줘, 제발.
이누마키 토게, 열일곱. 그는 한평생을 주언사로 살아 왔다. 남들과 같은 언어를 전부 이해하고 공부하되, 남들이 사용하는 언어 중 단 1%도 다 사용하지 못하는 혀는 이누마키 가문의 대대적인 술식이었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그건 저주가 될 것이다. 발음하는 대로 행해지리라. 그건 속박이 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제 이름 하나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핏덩이이자 또 주언사로 태어난 이누마키 토게는 한평생 통제를 학습해 왔다. 스스로에게 거는 억압과 억제는 남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한 수단이자 저 스스로를 보호하는 보호구가 되었다. 너의 말에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이 있단다, 토게. 항상 조심해야 해. 후회하지 않으려면…….
이누마키는 끝끝내 눈을 감지 못하고 숨이 멎은 하루의 자그마한 몸을 으스러질 듯 끌어안고는 생각했다. 이 순간을 후회할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질문의 결론이 차마 내려지지 않았음에도 이누마키 토게는 힘없이 늘어진 쵸우사기 하루의 몸에서 일말의 온기를 찾아 헤맸다. 혀끝으로 쉴 새 없이 밀려나오던 필사적인 문장들을 끝없이 쏟아부었다. 가지 마, 하루. 죽지 마. 나만 혼자 남겨 두지 마. 제가 살아 온 그 모든 생애를 부정해서라도 하루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네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나도.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다시 온대도. 하루, 나는 말이야. 나는 네가 다시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볼 수만 있다면.
그 순간이었다. 토게, 슬퍼하고 있네. 깜빡깜빡. 나비의 눈처럼 겹겹이 쌓여 있던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 애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했다.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 곤충의 눈을 가지게 된 하루. 모르포나비처럼 섬뜩한 색의 푸른빛의 날개가 돋아난 하루. 정말로 되살아나 자신을 꼭 끌어안아 주던 쵸우사기 하루. 그 애를 품속으로 깊이 받아들일 때면 은은하게 맴도는 은방울꽃의 향기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 버린 순간이었을까? 차가운 몸을 끌어안을 때의 두려움이 언젠가 우리가 함께 본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한평생 누군가를 구제하기 위해 살아 온 네가 나의 욕심으로 방금까지 제 손으로 숱하게 없애 온 하나의 사념체가 되어 있다. 완전히 죽지 못한 채. 제 의지와는 무관한 움직임으로, 표정으로, 순간 속에서 영원히. 소년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죄책감이 이누마키 토게를 갉아먹을 듯 커다래졌다. 모든 소리들이 멀어지던 시간, 이누마키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낯선 목소리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멀어지던 하루가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고 있음을 알았을 때. 그 애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저주받은 혀를 원망했을 때.
17시, 도쿄 도립 주술 고등전문학교 소속 주술사 쵸우사기 하루의 사망과 주령화 진행. 현현이 가능한 ?급 주령으로 확인.
18시, 주력을 추적한 결과 동일 인물임을 확인. 숨이 끊기는 순간 발동된 주언이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
20시, 별다른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아 생포 이후 1급 주술사 *** ****에 의해 상층부 지하에 봉인.
21시, 상층부에서 쵸우사기 하루의 최종 주살 결정.
04시, 도쿄 도립 주술 고등전문학교 소속 이누마키 토게, 감금되어 있던 쵸우사기 하루의 사형 집행 직전 사형을 맡은 주술사를 비롯한 일부 주술사를 공격한 후 도쿄를 이탈. 의도적으로 주력의 흔적을 지워 사정 거리를 벗어난 것으로 추정. 준 1급 주술사 이누마키 토게를 주저사로 명명.
06시, 주저사 이누마키 토게와 주령 ‘쵸’를 발견하는 즉시 주살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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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이누마키 토게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품에 죽은 듯 안겨 있던 쵸우사기 하루의 몸은 여전히 최후의 순간에 머무른 듯 싸늘했지만, 겹겹이 들어선 시선은 꿈뻑꿈뻑 필사적인 움직임을 따라 유영했다. 토게 군, 괜찮아? 약간 더 느릿하던 말씨나 얇고 다정한 목소리까지도 제가 기억하는 쵸우사기 하루의 모습 그대로였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주술사가, 주력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육체로, 주언에 의해 주령이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생전 모습 중 눈과 날개를 제외한 모든 부위들이 인간일 때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희박한 확률이었으니까. 이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신의 변덕일까, 형벌일까. 푸른빛의 날개가 느릿하게 나폴거렸다. 웅크려 있던 하루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도쿄 외곽을 벗어나던 이누마키는 기억도 나지 않는 유년기부터 내내 들어 왔던 말들을 떠올렸다. 토게, 말은 내뱉는 순간 돌이킬 수가 없단다. 네가 하는 말은 남들이 하는 말에는 담길 수 없는 힘이 있어. 그러니 끝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렴. 발음해 버린 뒤에는 늦어 버리니까. 수습할 수 없는 일을 후회하지 않도록…….
얼굴 위로 비 오듯 쏟아지던 땀과 뻐근하게 아려 오던 심장 따위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귓가를 맴도는 심장 소리는 꼭 죄책감이나 불안감 따위를 닮아 위협적으로 울려퍼졌다. 이봐, 여기 들어오면 안 돼. 상층부의 명령이다. 저 애는 여기서 숨을 끊어야 해. 그게 네 친구를 위하는 길이다. 어지러이 뒤섞이던 말소리 너머로 하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 죄를 지은 것처럼 손발이 묶인 채 토게 하고 제 이름을 부르던 쵸우사기 하루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천진한 웃음과 보드라운 살결, 봄날의 은방울꽃 따위가 떠오른 순간이었다. 아주 짧은 찰나가 이누마키 토게의 의식을 붙들었다. 아주 근본적이고 공포스러운 진실이 어느 어린 주언사의 무의식을 완전히 장악했다. 죽는 거야, 이대로. 지우지 못한 죄를 지은 것들처럼. 손발이 묶인 채 잔해도 없이. 아무런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조각난 정보들이 빼곡하게 이누마키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부화했고, 만개했고, 이내 쌓여 갔다. 한평생을 주술사로 살아온 쵸우사기 하루는 오늘 그 집단의 상층부에 의해 모르는 사람의 손에 죽임당한다. 내 손으로 너를 되살렸기 때문에. 이누마키 토게가 쵸우사기 하루의 부활을 원했기 때문에. 네가, 결국은 나 때문에.
진실들이 뇌리를 짧게 스친 채 나폴나폴 사라지던 순간부터 선택지는 이미 하나뿐이었는지도 몰라. 낮게 자리한 자세와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는 선택지를 향해 미친 듯이 기울던 몸. 날아가라. 부서져라. 일말마의 괴로움을 발음하던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린 이제 절대로 못 돌아가. 그게 학교든, 집이든, 설령 안식이라고 해도. 우리가 가려던 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이제 우리에게는 살아남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은 거야. 서로라는 품밖에 남지 않은 거야. 오로지 너와 나만이. 날아드는 공격들을 쉴 새 없이 쳐내던 이누마키의 손에 쵸우사기 하루의 야윈 팔목이 붙들렸다. 바다를 닮은 색의 얇은 날개가 느릿한 날갯짓을 시작한 순간, 세상의 시간이 멈추고 오로지 우리의 안위만이 선명해지던 바로 그 찰나. 하루는 여전히 다정하고, 평온하고, 또 애틋하던 죽음의 순간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럴 너를 또 한번 죽음의 곁으로 보내라니. 하루, 너라면 그럴 수 있어? 너라면 그렇게 할 거야? 정답은 간략했다. 쵸우사기 하루는 이누마키 토게를 구한다. 세상을 저주해서라도. 그러니 이누마키 토게의 선택 또한─
으스러져라.
하루, 걱정하지 마. 몇 번이라도 내가 널 구해 줄게. 내가 널 책임질게. 네가 온전히 살아 있을 수 있게. 창백한 온도의 뺨에 쉴 새 없이 숨을 묻으며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던 이누마키 토게의 선택 또한, 쵸우사기 하루의 현재를 구한다. 세상을 저주해서라도.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을 배반해서라도. 겹겹이 쌓인 연하늘 색의 한 꺼풀 눈동자 사이로 알 수 없는 애틋함이 파도처럼 드리우던 시간. 이누마키 토게는 생애를 피해 달렸다. 너를 버릴 수밖에 없는 모든 역할로부터, 너의 죽음을 그저 애도해야만 하는 알량한 정의와 신념으로부터. 하루, 괜찮아. 이제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거야. 아무도 우리를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가면 돼. 이누마키는 언제 마지막으로 완성해 보았는지 모를 기나긴 문장들을 쉴 새 없이 내뱉으며 하루의 야윈 몸을 끌어안았다. 더는 무엇도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너무 늦게 말해 줬지? 하루, 내 목소리 기억해? 평온한 얼굴로 죽은 듯 안겨 있던 쵸우사기 하루를 안심시키기 위해 알 수 없는 말들을 반복하던 이누마키 토게의 뺨에 새하얀 손끝이 맞닿았다.
“토게 군, 슬퍼하고 있어?”
“…… 아니. 그냥, 이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서.”
“바람이 차가워.”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야. 목을 감싼 팔이 조금 더 단단하게 닿아 왔다. 그 애의 품에 안겨 도쿄를 떠나는 내내 든 한 가지 의문. 너는 나와 함께 있어 행복할까? 이런 모습으로 삶을 선택한 네가, 한평생 누군가의 구제를 위해 싸워 온 네가 나를 원망하는 건 아닐까?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내달리던 이누마키 토게의 몸이 그 자리에 죽은 듯 멈춰섰다. 하루. 작게 불러 본 이름에 하루의 발끝에 땅에 닿았다. 조심스럽게 내민 걸음이 사뿐사뿐 꼭 나비의 춤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름답고, 고요하고, 우아하게. 네가 생전 내쉰 숨결과 같이 생기 있게. 얇은 날개가 잘게 나폴거렸다. 등 뒤로 비가 오듯 흐르는 땀줄기와 귓가를 울리는 쿵쿵 불안한 맥박의 심장 소리. 확신이 서지 않았다. 너를 되살린 그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너를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디살린 나를 용서할 수 있을지.
쵸우사기 하루가 나비와 같은 나폴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서 이누마키 토게를 바라보던 그 기나긴, 머나먼, 또 아주 찰나의 순간 속 미소를 발견했을 때. 네가 나를 향해 웃고 있다는 당연한 진실이 새삼스럽게 나의 삶 위로 와닿을 때. 그 순간, 이누마키는 생각했다. 아, 그 무엇도 틀리지 않았구나, 하고. 그의 어두운 보랏빛 눈동자 위로 한 줄기 빛이 어렸다. 그것의 이름은 확신이었다. 사뭇 반짝이던 두 시선 위에 쵸우사기 하루만이 유일하고 또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 어떤 선택도 되돌릴 수 없었고, 웃고 있는 그 익숙한 표정의 여자애와 눈이 마주친 순간 살기 위해 모든 걸 내팽개친 채 돌아선 소년은 비로소 제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그건 저주가 될 것이다. 발음하는 대로 행해지리라. 그건 속박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대로 끌어안으리라. 그건 영원이 될 것이다. 나는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는다. 죄책감에 모든 밤 네가 죽는 장면으로 돌아간대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거야. 너를 살리고, 너를 데리고 도망치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그 결심을 되뇌이는 선택을. 나는 단 한 번의 너도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온기 없는 손끝을 가만히 감싸쥔 손끝이 따스했다. 그뿐이면 충분했다. 그걸로도 좋았다, 충분히.
하루,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어? 우리가 어디에서 도망쳤는지 기억해? 상냥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루는 말했다. 글쎄, 기억이 잘 나지 않아. 하지만 거긴 조금 무서웠어. 토게 군이 없잖아. 다들 누군지 모르겠어. 어디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게 꼭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아, 나비의 꿈. 초봄에 찾아든 옅어진 은방울꽃의 오랜 향이 사라져 있던 곳. 쵸우사기 하루가 기억하는 건 오로지 이누마키 토게 하나뿐이었다. 그의 주언으로 되살아나, 꼭 무언가를 처음 인식한 작은 새처럼 소년을 뒤따르며. 생애에 각인을 새긴 듯 웃던 하루의 손을 붙든 손끝이 단단하게 살갗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엉켜든 손 아래로 온기가 맞닿자, 하루는 그 모습을 조금 오래 지켜보다 웃었다. 언젠가의 봄처럼. 우리가 평생 누군가의 그물망 아래를 도망칠 수 있을까? 평생 짓지 않은 죄를 피해 달릴 수 있을까, 하루. 잘 모르겠어. 무엇이 정답인지. 결국 어느 길이 옳았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한 가지 확실한 건 말이야. 나는 끝까지 네가 없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다는 거야.
세상 너머로 던져진 주언사와 쵸. 소년과 나비, 소년의 나비.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을 소유격들이 잎사귀 스치는 소리 아래로 가만히 섞여들었다. 앞으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네가 아니라 나의 몫이야. 도망치는 건, 살아남는 건 너의 몫이고. 하지만 네 옆엔 항상 내가 있어. 우리는 이제 떨어질 수가 없거든. 언제나 속으로 삼켜 왔던 말이 앞다투어 혀끝에 머물렀다. 이누마키 토게와 쵸우사기 하루를 이루는 모든 세계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꼭 종말을 향해 가듯, 이토록 아름다웠음에도.
“하루, 그 사람들은 당분간 쭉 우리를 찾으러 올 거야. 우리는 앞으로 늘 이렇게 도망쳐야 돼. 그래야 쭉 함께 있을 수 있어.”
“도망치지 않으면?”
“함께 죽는 거야. 그러니까 도망치고 싶지 않다면 말해 줘. 네가 외롭지 않도록 함께 있어 줄게. 떨어지지 마, 하루.”
걱정하지 마, 토게 군. 아무도 너를 죽일 수는 없어.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어리광을 부리듯 하루의 이마가 툭 이누마키의 품을 향해 닿았다. 토게 군, 내가 지켜 줄게. 이번에는 내가 너를 지켜 줄게. 언제까지고 이어지는 그 상냥함에 조금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루, 다정한 나의 쵸우사기 하루.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너는 그저 너야. 나는 그런 너를 사랑하지 않는 법 따위 알지 못해서. 그래서. 왜소한 몸을 으스러질 듯 끌어안던 소년의 손에 온기가 돌지 않는 창백한 손끝이 또 한 번 쥐여졌다. 푸른 날개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작게 움직이던 순간.
역시 나는 그 무엇도 후회할 수 없는 운명인가 봐, 하루…….
█
“생각보다 꽤 멀리 달아났구나. 어른 눈 피해서 몹쓸 짓을 하면 곤란하지. 토게 군, 우리는 구면이지? 이쪽의 ‘쵸’도 생전에는 그랬겠지만…….”
“…… 하루, 물러나.”
“이제 주언을 쓰는 법도 전부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나도 이런 핏덩이들을 죽이러 여기까지 오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1 급 주술사 A 씨는 중얼거렸다. 자주는 아니어도 종종 얼굴을 익힌 주술사. 목을 감싸듯 잠긴 지퍼를 열며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던 이누마키 토게의 손끝으로 잔뜩 힘이 실려 있었다. 도대체 몇 사람을 짓뭉갠 거지? 몇 사람이나 멀리 날려 보내고, 어딘가로 처박고, 또 생사를 알 수 없어 전투 불능 상황에 빠진 주술사들을 내팽개친 채 하루의 손을 잡고 끝없이 내달린 거지. 도무지 셈이 되지 않는다. 주령 ‘쵸’를 제령하기 위해 무수한 주술사들이 우리를 좇았고, 쫓기는 내내 이누마키의 신경은 극에 달할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저 사람은 다르다. 같은 1 급을 상정해 보아도 성인 주술사의 경력과 졸업도 전에 고전을 박차고 나온 어린 주저사의 경력은 하늘과 땅 차이. A는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구부정한 손가락으로 이누마키 토게를 가리켰다.
날아가라. 멈춰라. 부서져 버려. 목이 갈라지는 감각과 함께 저릿하게 피가 몰린 손끝을 꽉 쥐어 보이던 이누마키 토게의 눈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발끝은 걸음을 물릴 수 없다는 듯 단단하게 그 자리를 딛고 서서는. 말없이 자세를 낮춘 이누마키의 눈 위로 차오른 살심을 손쉽게 읽어낸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어린 애들은 안 된다니까. 오늘 네가 죽는 건 저 애를 빼돌렸기 때문이다. 저런 게 비주술사들의 인간 사회로 흐른다면 재해가 될 테니까. 지옥에서 원망하지 말고 기다리거라. 아, 날씨는 늦여름. 코끝에 곧 단풍으로 물들 새파란 녹음 냄새가 희미하게 스치던 순간. 은방울꽃이 그리웠다.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도 제 곁에 가만히 스미던 그 사랑스러운 꽃의 흔적이. 시야가 흐릿했고, 예상한 대로 주술사 A 씨는 지나치게 노련했고, 코앞까지 다가온 섬광과 함께 몸이 붕 떠오른 순간.
“토게 군을 아프게 하지 마.”
“너, 대체…….”
“방해하지 마. 우리는 아무도 죽이지 않아.”
아무도 해치지 않아. 상냥하게 속삭이던 나긋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사방으로 튀기던 피와 살점이 꼭 이질적이고 섬뜩한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아서. 뒤로 걸음을 물린 A 씨를 끝없이 따라잡는 하루의 걸음이 빨라질수록 등 뒤로 돋아난 푸른 빛의 날개는 거미줄 위로 맺힌 이슬처럼 쉴 새 없이 반짝였다. 쵸우사기 하루는 이누마키 토게를 구한다. 세상을 저주해서라도. 그 무엇도 기억하는 존재로 변한 뒤에도. 더 이상 그 애는 사랑이 아닌 그 무엇도 구제하지 않는다. 쓰라린 격통과 함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이누마키 토게의 뱀을 닮은 눈 위로 냉랭한 평정심이 스쳤다. 하루를 멈추는 순간 A 씨는 하루를 공격한다. 주령인 채로 죽는다면 정말로 돌이킬 수가 없어. 주령 ‘쵸’의 등급을 정확히 매기지 않은 채 곧바로 죽이려 든 것도 아마 이런 맥락이다. 원령 리카만큼의 효과가 아니더라도, 독이 인간 세계에 풀리는 순간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니까. 독을 품은 나비의 날개가 뚜렷한 색으로 물들던 순간. 하루의 손끝이 망설임 없이 A 씨의 목 위로 날아든 순간. 이누마키는 쉰 목으로 작게 외쳤다. 하루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하루, 돌아와. 죽이면 안 돼.”
“토게 군, 아프지 않아? 이 사람이 토게 군을 아프게 했잖아.”
“나랑 멀어지지 마. 함께여야지, 하루.”
말간 뺨 위로 배시시 번져 가던 미소가 좋았다. 단지 이 일상적인 장면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숨을 죽인 채 살며. 하루의 독이 잠시 스친 상처 부위가 거뭇하게 변하는 장면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A 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토게의 뒤로 숨어 섬뜩한 미소를 짓던 쵸우사기 하루를 바라보았다. 주령 ‘쵸’, 예상 등급 특급. 독나비로 명칭이 정정될 그 새파란 애송이를. 생전의 모습과 달라진 게 거의 존재하지 않는 모습으로 저토록 잔인하고 또 순종적으로, 이 흐름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만 또 무엇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맹목적으로. 주언사의 주력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몸으로도 그를 따르면서. 비틀비틀 상처를 감싸쥔 채 일어선 그는 당혹감이 잔뜩 물든 눈을 하고 웃었다. 어이, 꼬맹아. 너…… 네 친구를 살리고 주저사가 된 걸 미친 듯이 후회하게 될 것 같지 않냐? 이제 저건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몸이 됐다고. 네 덕분에. 고죠 사토루의 손으로 제자를 죽이게 할 셈이냐? 혈흔 섞인 기침이 밀려나오는 듯 버겁게 숨을 몰아쉬던 그의 안색이 자꾸만 어두워졌다. 독이 몸에 퍼지는 듯 주춤주춤 물러서던 몸을 토게는 굳이 뒤쫓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아.”
“…….”
“하루에게 주언을 사용한 것도, 주저사가 되어 버린 것도.”
저주하고 저주하라. 숨이 다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완전히 집어삼킬 때까지. 죽음을, 운명을, 숨을 다한 순리를. 지퍼를 끌어올린 토게의 빤한 시선이 아슬아슬하게 그들을 대치하고 있던 A 씨에게로 닿았다. 그들의 숨을 거두러 온 아무개에게로. 자신을 애틋하게 끌어안은 하루의 몸을 끌어안은 채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끝없이 내달리면서. 피 냄새. 싫어. 토게 군을 다치게 하는 건 전부 용서할 수 없어. 어리광을 부리듯 이누마키의 목덜미 위로 제 고개를 짜증스럽게 파묻던 하루의 품에서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더 이상 너의 영혼에서는 어떤 향도 남아 있지 않는다고 해도. 연하늘색의 눈동자가 겹겹이 쌓여 이질적인 곤충의 복안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느린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드러나던 큼직한 눈동자도, 나긋하고 여유로운 표정도, 말간 뺨 위로 스친 초봄을 닮은 너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미소도 전부 무사했다. 그 모든 문장이, 모든 장면이. 그거면 충분했다.
하루, 나는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아.
너를 사랑한 나의 그 어떤 선택도.
절망보다 빠르게 달리던 이누마키 토게의 걸음이 멈출 줄 모르고 이어졌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 묻는다면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딱 그뿐이었다. 운명을 피해 달아나고 있노라고. 죽음이 없는 곳으로. 순리가 없는 곳으로. 시간이 멈춘 듯한 설원에 파묻혀 다시는 발견되지 못하더라도, 결국…….
나비의 날갯짓이 멈추지 않을 너의 시대에서,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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